유라시아 횡단열차 탑승기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과 대륙횡단 열차여행

광복 70주년을 맞아 부산과 목표에서 KTX로 출발 서울에서 합류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으로 이동 유라시아를 횡단, 베를린에 이르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2015’ 운행 행사가 7월14일부터 8월2일까지 실시된다고 한다. 코레일과 함께 이번 행사를 공동 주관하는 외교부는 “이번 친선특급은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구현하기 위한 대표 사업으로 소통협력, 미래창조, 평화화합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18년 전 중국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할 때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중국의 베이징(北京)까지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불리는 유라시아 특급을 미리 타 보았다. ‘통일의 꿈’을 안고 달리는 이번 유라시아 친선특급을 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외람스럽지만 나의 소박한 탑승기를 소개하여 참고가 되도록 하고 싶다.

우리 가족은 열차여행을 좋아한다. 외교관으로 중동지역에 근무할 때 전지 휴가를 얻으면 유로 레일 패스를 사서 가족이 열차여행을 통해 유럽을 둘러보았다. 그 때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열차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우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에 대한 책을 구입하였다. 미국에서 발간된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이러한 말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본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아직 타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빨리 타 보라는 독촉 메시지로 다가왔다.

대학생 시절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를 좋아했다. 구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나르크가 지은 소설로 “지바고”라는 의사를 통해 소련의 공산혁명으로 운명이 희롱당한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었다. 이 소설은 소련에서 출판 못하고 이탈리아에서 출판(1957)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어 그 다음해(1958) 노벨 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다. 미국에서 만든 동명(同名)의 영화를 보면 시베리아 행 피난열차를 타고 우랄산맥을 넘어 설원(雪原)을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거대한 시베리아 평원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1997년 베이징의 대사관 근무 2년 차 여름휴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휴가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지 못한다면  시베리아의 대평원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장녀는 학교 일로 참석 못하여 우리 내외와 장남 등 가족 3인은 편도만 꼬박 일주일 걸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를 이용하려는 여행계획에 마음이 설레었다. 평소 얻기 어려운 2주일의 긴 휴가를 얻어 일주일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나머지 일주일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본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전장 9288 km의 유라시아 횡단철도이다.

대륙횡단철도 부설 경쟁 

유럽에서 19세기 중반이 되어 철도 수송이 중요해지자 미국 캐나다 등의 대륙국가가 경쟁적으로 장거리 대륙횡단철도를 부설하고 있었다. 1869년 미국이 가장 먼저 대륙횡단철도를 완공하였고 이어서 1885년 캐나다가 태평양횡단철도를 완성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더 3세는 극동진출을 위해 동맹국인 프랑스의 자본을 빌려 철도 부설을 시작하였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양쪽에서 공사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기공식에는 아시아를 여행 중인 황태자 니콜라이가 참석하고 계속해서 철도부설의 책임자가 되도록 칙유(勅諭)를 내렸다.

당시 23세의 니콜라이 황태자는 황제의 칙유대로 일본 등 아시아를 순방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시베리아 철도부설 기공식에 참석했다. 1891년 5월 19일이었다. 당시 기록 사진을 보면 무슨 일인지 니콜라이 황태자의 머리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기어 있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피습사건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 방문 시 일본의 경호경찰의 칼을 맞아 입은 상처였다. 오쓰(大津)사건으로 전해진 일본 중부 시가현(滋賀縣)의 오쓰에서 비와코(琵琶湖)를 관광하고 있던 니콜라이 황태자를 쓰다(津田)라는 경호경찰이 느닷없이 칼로 내려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891년 5월 11일 오후였다. 처음 내리 친 칼날이 약간 빗나가자 그 경찰이 두 번 내려칠 때 황태자 수행원이 재빠르게 지팡이로 칼날을 막아 니콜라이 황태자는 목숨을 건졌다. 황태자는 도쿄를 방문 일본천황을 만나는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부설이 25년간의 공사를 끝내고 1916년 10월 전구간이 완공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과 열차 내 식사


우리는 중국 베이징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베이징(莫斯科-北京)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한번만 이용하기로 하고 베이징에서 모스크바로 갈 때 탈 것이냐 모스크바에서 돌아 올 때 탈 것이냐고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하였다. 일주일동안 열차 안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세끼 식사해결이 문제였다. 열차의 식당 칸이 있지만 메뉴가 한정되어 있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 분의 식사를 위한 밑반찬은 잔득 준비해야 했다. 베이징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면 일주일 음식을 모두 소진하게 되어 모스크바에 내릴 때 짐이 가벼워진다. 러시아에서의 관광이 간편해 진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의 열차여행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막상 러시아에 도착해서는 피곤해서 돌아다니기가 싫어질 수 있는 우려도 있다. 생각 끝에 짐은 많지만 모스크바 갈 때는 항공기를 이용하고 돌아올 때 열차를 타도록 하여 여행 중의 피로를 집이 있는 베이징에서 풀기로 하였다.

키릴 문자를 익히면 러시아 여행이 즐겁다


항공편으로 모스크바에 도착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7일간 열차여행을 감안 모스크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3일로 나누어 관광하기로 하였다. 우선 러시아어를 표기할 때 사용하는 키릴 문자를 익혔다. 키릴 문자는 페니키아 또는 그리스 문자의 계통의 음소(音素)문자로 33개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외워두면 러시아어로 표기된 간판 지하철 역 등을 읽어 낼 수 있다. 마치 한글의 모음 자음 24자를 알아 적의 조합하면 한글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러시아어를 별도로 공부하지 않은 관광객이라도 키릴 문자를 읽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된다. 러시아어에 우리가 아는 외래어가 많이 들어 있어 읽어 보면 금방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택시 스톱” “메트로” “커피 하우스” 등이 그렇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 보면 책을 통해 알게 된 주요 관광지 지명이 지하철 역명에 나타나 있어 읽을 수 있다면 물어 보지도 않고 알아서 내리게 된다.

크렘린, 바실리성당, 붉은 광장 등 모스크바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고 모스크바에서 650km 떨어진 러시아 고도(古都)이며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할 때는 “붉은 화살”이라는 야간열차를 이용하였다. 우리는 모스크바의 호텔주인에게 베이징에서 가져 온 일주일 분의 식품을 맡기고 떠났다. 어차피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다시 짐을 찾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된다.

유라시아 횡단열차 탑승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유명한 여름궁전과 과거 러시아의 황제들의 호화로운 수집품이 전시된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 온 우리는 호텔에 들러 짐을 찾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나갔다. 모스크바-베이징의 국제 열차 차표를 미리 구입한 지인이 역으로 나와 주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왕복하는 국제열차는 중국열차와 러시아열차 두 편이 있었다. 당시 치안이 불안한 러시아에서 국제열차 승객을 대상으로 하는 갱단의 사건이 보도되고 있어 안전을 고려하여 중국 열차를 선택했다. 중국에 근무하는 외교관 가족으로서 중국 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문제가 있다면 열차 승무원과 중국어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열차라서 러시아열차와 달리 객실이 동양인의 체격에 맞추어 조금 작지 않을 까 걱정했는데 막상 열차를 타보니 독일제 차량으로 유럽 기준으로 만들어진 안락한 열차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출발한다. 이 역에서 제정 러시아 시대 시베리아 유형(流刑)길의 사람과 생이별하기도 하고 시베리아 개척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한 유서 깊은 역이다. 1940년대 일본의 마스오카(松岡洋右)외상이 소련과 일소(日蘇)중립조약에 사인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야로슬라브스키 역으로 나갔는데 당시 최고 지도자 스탈린이 이례적으로 친히 역까지 나가 배웅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나치 독일의 공격과 제국 일본의 공격을 양쪽에서 받아야 했던 스탈린으로서는 일본과의 중립조약이 더 없이 고마웠던 것이다.

시베리아 열차 내 풍경


우리에게는 아래 위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침대칸 객실(컴파트먼트)이 배정되었다. 쿠페라는 2등 칸이다. 1등 칸은 룩스라 하여 침대가 2개뿐인 호화로운 객실이고 3등 칸은 6인이 쓰는 침대칸도 있다. 우리 가족은 3명이지만 4인용 전체 컴파트먼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한 사람 몫의 침대에는 짐을 끌어 올렸다.

출발시간이 되니 열차는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여름 날 늦은 오후지만 아직 햇살은 강했다. 이윽고 열차는 도시 풍경을 뒤로 했다. 이윽고 차창에 보이는 모습은 모스크바 교외의 주말 별장 “다차”였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러시아인의 꿈은 교외에 “다차”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다차”는 러시아어로 “주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황제가 신하에게 농노가 딸린 전원(封土)를 수여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차창에서 비친 “다차”에는 터 밭이 있고 도시 거주 러시아인들이 한가로이 야채를 가꾸는 모습이 평화스럽게 보였다.

모스크바를 떠난 열차가 도중 역에 도착하면 우리와 같은 베이징까지의 승객은 열차에서 내릴 수는 있어도 역 밖으로는 못나간다. 30분 정도 열차가 쉬면서 새로운 승객을 태우고 기름과 물을 넣으면서 필요한 점검을 하는 것 같았다. 저녁시간이 되면 열차 승객도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식당차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역구내로 쏟아져 들어 온 현지의 행상으로부터 빵 과일 야채를 사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도 러시아 루블화 잔돈을 잔뜩 준비하여 빵과 야채를 샀다. 빵은 방금 오븐에서 구워 낸 것 같이 따끈따끈했다. 여름이라 과일도 흔하고 상추 같은 야채가 신선했다.

집사람은 방금 구입한 빵과 야채를 이용 3인분의 샌드위치를 솜씨 좋게 만들어 냈다. 맛이 있었다. 이렇게 7일 동안 매끼 외부에서 가져오는 현지의 식품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은 열차 내에서 공급이 되어 커피 또는 녹차를 마실 수 있었다. 준비해 간 컵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스프처럼 샌드위치와 같이 먹으니 피로가 풀리면서 일품이었다. 때로는 준비해 간 김치 볶음을 먹으면 속이 개운했다. 시계를 보니 자정에 가까웠지만 밖은 계속 낮이다. 이른 바 백야(白夜)현상으로 해가 지지 않는 것 같다. 차창의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몽골의 전설적 영웅 우랄 이야기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책자를 보면서 우리가 어디 쯤 가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우랄 산맥을 언제 쯤 넘을까하고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우랄은 본래 “우랄 바토르” 즉 전설적인 몽골족 영웅(바토르) 우랄에서 연유된다고 한다. 영웅 우랄이 종족을 위해 희생되어 사람들의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무덤에 돌을 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우랄산맥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우랄 산맥은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대륙의 경계로 러시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산맥인데 그 길이가 2000km 정도 된다. 우랄 산맥의 고도는 평균 1000m이나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으로 남부는 비교적 낮고 넓은 구릉상태의 습곡산맥이다. 횡단 열차는 남부 우랄 산맥을 통과할 때 제대로 된 터널 통과 없이 우랄산맥을 구렁이 담 넘듯 서서히 넘어 서(西)시베리아로 향하고 있었다. 지도에서나 느끼는 분계선을 현지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다. 열차는 예카테린부르크 역에 도착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니콜라이 2세의 일본과 악연과 로마노프 왕조 멸망


전술한 바와 같이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본 방문 중 크게 부상을 입었으나 예정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기공식에 참석한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3년 후 인 1894년 부왕 알렉산더 3세의 급서로 황제 ‘차르’가 된다. 활달하고 야심이 많았던 알렉산더 3세는 한참 나이인 49세 때 신장염으로 급사한다. 26세의 황태자는 전혀 준비 안 된 채로 “되고 싶지 않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되었다. 그의 대관식에는 고종의 시종무관 민영환이 참석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와 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치를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이 아니라 외치(外治)에도 소홀히 하여 러일전쟁에 패배한다.

전쟁으로 경제는 피폐되고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2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군에 의해 폐위되고 가족 함께 갇히는 몸이 된다. 자신이 기공(起工)하고 건설 감독을 맡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부활을 우려한 혁명군은 황제가족을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로 이감(移監)시켜 처형하였다. 1918년 7월17일이었다. 당시 50세의 황제와 황후, 4명의 아리따운 공주 그리고 혈우병으로 제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알렉세이 황태자 등 전 가족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수행원 등 수 십 명도 처형되었다. 처형된 곳이 이파티예브 하우스로 현재 보존되고 있다고 하지만 역에서 내려 가볼 수는 없다. 다만 이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제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라는 생각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고인의 명복을 빌어 보았다. 황태자 시절 일본과의 악연으로 일본에서 황당한 부상을 입고 다시 일본과의 전쟁에서 국력을 소모하여 공산 혁명의 명분을 주어 결국 1613년부터 이어져 온 300년의 로마노프 왕조가 문을 닫게 만든 장본인이다.

또 하나의 버킷 리스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열정이 있는 로맨틱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는 일주일 동안 샤워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도 불편한 이 열차를 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웃 칸의 사람들과도 뭔가 인생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하나를 해낸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쉽게 친해졌다. 우리 바로 옆 칸에는 벨기에 교수가 타고 있었다. 그는 일생의 꿈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것이었다면서 마치 꿈이 이루어진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베이징에 국제회의가 있어 부부동반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부인은 열차여행을 싫어하여 항공편을 이용하고 자신은 조금 일찍 출발 모스크바로 날라 와서 이 열차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치 아파트의 이웃처럼 초대하고 초대 받기도하면서 각자 가져온 비상식량을 나누어 먹고 유라시아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민족의 고향 바이칼 호 와 데카브리스트가 만든 도시


며칠이 지났다. 열차가 멈춘 곳은 이르쿠츠크란 도시이다. 시베리아의 대표적 유형자(流刑者) 도시로 한때 시민의 두 사람 중 한사람은 유형자 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2월 혁명당이라는 의미의 데카브리스트들은 모두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그들은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을 받은 젊은 장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텔리들로서 니콜라이 2세의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의 절대 왕정에 항거하여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1825년 12월이었다. 혁명에 실패하여 유배되었지만 그들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상적인 유럽 문화 수준의 도시를 만들었다.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곳에서 세계 최대의 깨끗한 담수 호수 바이칼 호가 멀지 않다. 바이칼은 특별한 의미는 없고 현지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우리 한민족이 이 바이칼 호 연안에 살다가 남하하였다는 설이 있어 친숙한 기분이 드는 호수이다. 열차는 바이칼 호의 남서쪽으로 감아 돌면서 5시간 이상 달린다. 따라서 5시간 이상을 끝없이 펼쳐지는 바이칼 호수를 차창을 통해 원도 한도 없이 볼 수 있었다. 달려가서 통째로 마시고 싶도록 바닥이 환히 보이는 맑고 깨끗한 호수를 언제 다시 볼까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과거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의 가장 장애가 된 곳이 세계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 호수였다고 한다. 전체 길이 640km의 호수를 종단하기 위해 겨울에는 얼음 위로 레일을 임시로 깔아 달리게 하였고 여름에는 열차 페리를 운행케 하여 페리 선박이 레일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1905년이 되어서 환(環)바이칼 철도(circum-Baikal)가 완공된다. 시베리아의 진주(眞珠) 바이칼 호를 달린 기차는 울란우데에 도착한다. 17세기 중반 코사크부대가 ‘우데’ 강 하류에 요새를 건설한 것이 도시의 시초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붉은 우데’ 즉 ‘울란 우데’로 바뀌었다. 여기서 직진하면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지고 우회전하여 몽골 횡단철도(TMGR)를 이용하면 몽골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한다. 울란바토르를 거쳐야 베이징을 향하게 된다.

울란바토르에서 만난 사람


몽골 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울란바토르는 문자 그대로 ‘붉은(울란) 영웅(바토르)’의 의미이다. 1924년 구소련의 지원으로 중국에서 독립한 몽골 인민공화국이 처음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울란바토르 역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타기 시작한다. 베이징으로 가는 승객이다. 우리는 6일간의 여행이 끝난 상황으로 이제 하루 밤만 지내면 베이징에 도착한다는 안도감이 들어 곧 내릴 듯이 흩어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긴 여행의 종착역을 바로 앞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침 가까운 컴파트먼트의 승객으로서 창가에서 쉬고 있는 서양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울란바토르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본국에서 부모님이 방문하여 베이징 구경을 시켜 드리기 위해 이 열차를 탔다고 한다. 벌써부터 상당히 지루한 여행이 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우리는 베이징은 금방이다 이제 다 왔다고 했더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거리란 상대개념이다. 긴 여행의 우리와 이제 열차를 금방 탄 승객과는 거리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울란바토로를 떠난 기차는 몽골과 중국의 국경도시에 도착했다. 차내 안내방송이 열차의 바퀴를 바꾸어야 한다면서 승객들은 잠시 내려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내리지 않고 열차의 바퀴를 어떻게 갈아 끼우는가를 보고 싶었다.

러시아의 광궤 그리고 중국의 유럽식 표준궤


알렉산더 3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만들 때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준궤(1435mm)에 따르지 않고 조금 넓은 광궤(1520mm)를 놓도록 지시하였다. 과거 나폴레옹 1세의 침범을 경험한 러시아는 또 다시 나폴레옹 같은 침략자가 러시아의 철도 레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유럽과 다른 궤도의 철도를 놓은 것이다.

구소련의 지원으로 독립한 몽골공화국은 러시아와 같은 광궤로 부설하였으니 문제가 없다. 그러나 중국이 문제였다. 중국은 청말 민간자본으로 독일 프랑스 등의 자본과 기술을 통해 철도를 부설하였다. 모두 유럽식의 표준궤다. 1950년대 중소(中蘇)분쟁으로 구소련의 침입을 우려한 중국은 우연히도 중국과 소련의 철도 폭이 달랐던 것에 안심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소련군이 열차를 이용 중국을 곧 바로 침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열차는 궤도조정 수리 창으로 들어간다. 공장안의 크레인이 열차를 하나 씩 들어 올리더니 지금까지 달려 온 광궤 폭 열차의 바퀴세트를 내리고 표준궤에 맞는 바퀴세트를 새로이 끼우는 작업을 하였다. 작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바퀴세트를 갈아 끼운 열차는 수리 창을 떠나 본래의 홈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열차에서 내려 역구내에서 쇼핑을 하던 승객들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온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수고가 필요 없을 것 같다. 최근 한국 철도연구기술원은 한국의 표준궤와 러시아의 광궤 모두에서 운행할 수 있는 ‘궤간 가변열차’ 기술의 개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한국 열차가 논스톱으로 러시아까지 달릴 수  있게 된다.

바퀴세트도 갈아 끼웠으므로 이제 중국 베이징으로 들어갈 준비는 다 끝냈다. 열차는 밤사이 몽골 공화국과 중국의 내몽고를 지났다. 아침이 되니 열차는 바다링(八達嶺)의 터널을 뚫고 쥐용관(居庸關)을 바라보면서 베이징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얼마 후 베이징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일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무사히 끝냈다. 만감이 교차하였다.

미래 유라시아 시대의 주역이 될 코리아


유라시아의 시대이다. 1930년대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가는 교통수단으로서 선박의 경우 40일간 걸리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15일 만에 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손기정 선수도 이 철도를 이용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변화로 한반도에서 대륙의 열차 여행은 불가능 했다.

지난 해 8월 ‘원 코리아 뉴 유라시아(One Korea, New-Eurasia)’ 자전거 평화 원정대가 독일 베를린을 출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서울에 이르는 거리를 자전거로 주파하였다. 한반도 통일과 유라시아 시대의 개막을 염원하여 독일에서 서울까지 15,000km 대장정이었다. 이번 7월의 유라시아 친선 특급도 한반도의 ‘통일의 꿈’을 안고 베를린까지 달리는 빅 이벤트다. 다만 북한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행히 이달 27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국제철도협력기구(OSJD)회원국 사장들이 서울에 모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정회원국이 아니지만 회원국들은 ‘서울선언문’을 채택하여 한국 철도의 대륙철도 진출을 공식 지지할 예정이다. 한국철도와 대륙철도와의 연결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인구의 70%가 산다는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한반도의 한국은 대륙에 막힌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미래의 유라시아의 주역이 될 우리는 이제부터 생각의 지평선에 대륙철도를 놓아야 한다.  새로운 ‘유라시아 대륙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의 또 한 번의 도약이 기대된다.